오예준(32기)/신앙 (r54)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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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성경]]
[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성경)]
==개요==
 성경의 내용과 해석, [[인천과학고등학교|인곽]] 학생으로서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교훈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 지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들어가기 전에==
 성경은 현대의 문헌과 다른 점이 몇몇 있고 읽을 때 유의할 점이 있다.
===면책 조항===
 성경에 과학적, 역사적으로 틀린 것처럼 보이는 표현이 나온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오류 없이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고, 과학책이나 역사책이 아니다. 과학, 역사 지식이 부족한 고대인들의 수준에서 틀리게 서술했다고 해도 구원[* 모든 인간이 묶여 있는 무거운 죄의 짐을 벗고, 하나님과의 순수한 관계를 회복하며,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죽은 뒤 삶에서 영원히 살면서 행복해지는 것.]에 이르는 진리까지 오류를 범했다는 뜻이 아니다. 수천 년 전 사람들에게 뭐 틀렸다고 엄청 뭐라 하진 말자.
===성경의 사본===
 성경은 총 66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에 원본이 전해지는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그래서 아주 오래된 사본들을 비교해서 원본을 추측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를 '본문 비평'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본들 간의 차이는 대부분 단순 오타이거나 단어 선택 차이이다. 따라서 이것도 성경 전체의 신뢰성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때로는 문장 몇 개가 통째로 빠지거나 추가된 게 있긴 한데, 이는 필사자들이 필사하면서 설명을 위해 추가한 구절들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믿음직스러운 사본은 발견된 바 없다.
===고대 근동 문헌의 서술 특징===
 고대 근동 문헌은 지금과는 다른 서술 특징이 나타나는데, 현대의 기준에 맞춰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서 성경을 쓰게 하였지만,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쓰라고 하지는 않았다. 성경의 각 책은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신념을 고려해야 한다.

 다만 이 말은 보수적인 측과 진보적인 측의 중간 주장일 뿐, (이단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많이 보수적인 부류 성경의 작성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크게 보아 성경의 내용은 저자의 신념과는 상관 없다고 보기도 하고, 매우 진보적인 부류는 사람의 역할을 더 크게 보기도 한다.
===해석의 다양성===
 기독교는 엄청나게 오래된 종교인 만큼 종파가 엄청나게 많고, 성경의 각 사건에 대하여 종파들끼리 해석도 약간씩 다르다. 이 문서에 여러 종류의 해석이 있다고 해도 모든 가능한 해석을 다 포함한 것은 아닐 수도 있으며, 서술자의 주관이 개입될 수 있다.

==모세오경==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구약의 처음 다섯 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전통적으로 모세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모세가 모세오경을 100% 썼고 그 내용이 완벽하게 100% 그대로 내려온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모세오경의 핵심적인 내용은 모세가 한 일들과 모세의 가르침이고, 그가 없다면 모세오경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하며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탈출을 다룬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율법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떠도는 동안 겪은 일을 기록했다.

==천지 창조==
 태초는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하나님은 이미 계셨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로 결심했고, 말씀하심으로써 창조를 시작한다. 첫째로, 그는
 "[[임빛나(32기)|빛이 있으라]]."
 라고 말씀하시니 곧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어서 빛을 낮, 어둠을 밤이라 불렀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으니 첫째 날이었다. 하나님은 그 다음 하늘을 기준으로 물을 갈라서 하늘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바다로 만드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서 둘째 날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셋째 날에는 식물, 넷째 날에는 해[* '큰 광명체'라 적혀있다. 다른 신화에서 흔히 신으로 묘사된 태양을 한낮 빛을 내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효과가 있다.]와 달[* '작은 광명체'라 적혀있다.]과 별, 다섯째 날에는 동물들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 하지만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는데, 이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가꾸어나갈 통치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닮게 사람을 만들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스리게 하자."
 고 말씀하시며 흙에 자신의 숨을 불어 넣어 사람을 만드니 그가 바로 첫 사람 아담이다. 또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만들어 거기에 여러 나무와 동물들을 두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만들었다. 에덴 동산의 가운데에는 '선악나무'와 '생명나무'를 두었고 아담을 에덴 동산의 관리자로 두었다. 어느 날 아담이 외로워하는 걸 본 하나님은 아담이 자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떼어서 첫 여자를 만들고 그 이름을 '하와[* 이브라고도 한다.]'라 했다. 아담이 일어나서 하와를 보고는, 
 "너는 내 뼈 중에 뼈이고 살 중에 살이구나."
 하였고 이렇게 남자와 여자는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이다.[* 결혼의 시작이다.] 한편, 아직 이때까지는 인간들이 선악을 몰라 벌거벗고 있었다.
 이렇게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 다음 날에 쉬었다. 이것이 안식일의 기원이며, 일요일에 쉬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원래 안식일은 토요일이지만 로마에서 어찌 저찌 하다 보니 일요일에 쉬게 되었다.]
===해석 :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있었고 온 세상과 우리를 만드신 분이다. 
===사람을 신의 형상에 닮게 창조된 것에 대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처럼 생각할 수 있고 그분과 같은 사랑, 동정, 연민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선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이 '우리'라 하신 이유===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은 '나'라 하지 않고 '우리'라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첫째,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라고 말씀하셨다는 해석이다. 둘째, 고대 근동에서는 왕을 복수형으로 나타내어 높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라는 표현을 썼다는 해석이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
 우리는 [[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므로 [[과학(교과목)|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다. 현대 과학에서는 단 6일 만의 창조는 부정되며 인간도 단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진화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기독교인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에 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2가지가 있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믿는 파와, 진화론을 받아들이자는 파가 있으며, 각각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유신진화론과 특수 창조론====
 2025년 6월 4일, 서울신학대학교 박영식 교수가 해임되었다. 그가 '유신진화론'을 지지했다는 이유였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1076|관련 기사1]]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2213|2]]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6233|3]]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6428|4]] 도대체 유신진화론이 뭘까?
 먼저, 진화론이 등장하기 전에는 6일 창조론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실 무언가 특별한 근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딱히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59년에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며 기존의 6일 창조론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에 기독교인들은 크게 두 파로 나뉘어 각자 주장을 한다.

 1. 유신진화론(진화적 창조론)
 이 견해는 넓은 스펙트럼이 있지만 공통적인 주장은 하나님이 진화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경을 내려주셨지만 또 이성도 주셨고,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게 되므로 이성적 연구의 결과물인 진화론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2. 특수 창조론
 특수 창조론은 하나님이 성경에 쓰여 있는 그대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하는 해석이다. 그들은 창세기의 창조를 유신진화론처럼 지나치게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성경의 신뢰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각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유신진화론 측
 성경에 적힌 창조 기사는 하나님이 히브리인 수준에 맞춰 창조를 설명한 것 뿐이며, 무언가 과학적으로 서술하려던 것이 아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빅뱅에 대해 설명하며, 쿼크와 렙톤과 광자의 형성 및 태양계의 형성, 지구의 형성, 원시 지구에서의 복잡한 유기물의 생성에 대해 알려줄 이유가 뭔가? 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뿐더러 사실 알 필요도 없다.
 창세기 1장에서 '날'이라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욤(히 : יום, 영 : yom)인데, 이건 지구가 한 바퀴 도는 하루란 뜻도 있지만 특정한 기간을 뜻할 때도 있다. 첫째 יום을 첫째 기간, 둘째 יום을 둘째 기간이라 해도 된다. 애초에 태양이 첫째 날부터 있던 게 아니어서 낮과 밤이 없는데 하루가 무슨 의미인가?
 천동설을 배격하고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가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권의 책을 주셨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 즉 과학이라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장 20절)

 이는 오랫동안 '자연 신학'의 근거로 사용되어 왔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질을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만물에 적어 놓았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하나님을 바라보는 폭이 넓어지고 그분을 더 잘 알게 된다. 또,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여기서 말씀은 그리스어로 '[[LOGIC|로고스]](헬 : λόγος, 영 : logos)'로, 논리, 이성, 진리를 뜻한다.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은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이상한 분이 아니라 논리적이시고 아름다우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이용해 하나님에 대해 더 알 수 있다. 교회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당시의 잘못된 성경 해석[* 여호수아에서 해가 멈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가지고 '지구가 도는 거면 하나님이 지구가 멈췄다고 써 놓았겠지, 왜 굳이 태양이 멈췄다고 썼겠느냐?'고 생각했다.]
 진화론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확고한 이론이다. 엄청나게 많은 화석과 각 종들의 유전자가 증명했으며 지금도 무수히 많이 증명되고 있다. 이것을 기독교인들이 거부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논리를 싫어하는 반지성주의자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지 않을까? 심지어 진화론이 탄생하기도 전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조차 이성과 경험에 의한 확실한 사실에 대해 성경에 근거한답시고 허튼 소리를 하면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의 무식함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했다.

 특수 창조론 측
 물론 진화론이 현재 주류 과학계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은 맞다. 하지만 완벽한 [[과학(교과목)|과학]] 이론은 없다. 인간이 세운 모든 과학 이론은 계속 변해왔으며, 진화론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지금까지 한때의 과학 이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은 그 이론이 무너지자 함께 무너졌다. 게다가 성경을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비유라는 듯이 해석한다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닌가?
 그리고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기독교의 다른 교리들과 모순이 생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자신을 닮게'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진화적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면 도대체 자신을 닮은 게 언제인가? 언제부터 사람인가? 진화론에 따르면 사람은 계속 변한다. 또,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창세기 1장 11절)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장 21절)

 여기에선 '종류대로'라는 말을 엄청 강조하는데 진화론처럼 생물들이 연속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 종류가 명확히 나뉘어져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날'이라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욤이 물론 하루 외에도 기간이란 뜻도 있지만, 하지만 창조 기사에서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고, 성경의 다른 구절은 '아침'이나 '저녁'이 오면 욤을 하루로 해석하는 빈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욤을 날이라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은 세상과 구별되어 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다. 바뀔 수도 있는 현재의 과학에 얽매여 왜 세상 삶과 타협하려 하는가? 억지로 세상에 맞추려 하면 도대체 기독교인인 의미가 무엇이란 말인가?
 또, 진화론이 참이라면 이전에도 약육강식과 고통, 재해가 있었다. 이는 사람의 원죄 이후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원죄론을 약화시키고, 결국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인 예수님이 되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벌 받았다는 사상]의 필요성을 상실하게 한다.

====실용주의적 해석====
 중요한 건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 지가 아니라, 창조의 의미를 따지는 것이다. 창조의 방법이 어떠했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창조된 우리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며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청지기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

 라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고대 근동 창조 신화와 유사성===
====에누마 엘리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기원전 18세기 경 수메르와 아카드를 계승한 '바빌로니아'라는 문명이 있었다. 그런데 바빌로니아 창조 신화와 창세기가 유사하다는 주장이 있다. 먼저 바빌로니아 신화를 대충 요약하다면 다음과 같다.

 태초에 아무것도 없고 '티아마트'라는 바다의 여신이 있었다. 그녀는 혼돈을 상징한다. 티아마트는 여러 젊은 신들을 낳는데, 젊은 신들이 소란스럽게 하자 남편 압수와 함께 그들을 죽이려 하지만 압수가 지혜의 신 에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티아마트는 화가 나 자신을 따르는 신인 '킨구'에게 신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준다. 이에 반대하여 에아의 아들인 마르두크가 출전한다. 마르두크는 자신의 능력으로 티아마트와 맞서 싸워 티아마트를 반으로 가르고, 상반신은 하늘, 하반신은 땅으로 만든다.

 여기서 혼돈을 상징하는 여신 티아마트는 '흑암'이라는 뜻이자 역시 혼돈을 상징하는 히브리어 단어 '테훔(히 : תְּהוֹם, 영 : tehom)'과 유사한데, 창세기에도 테훔이 쓰인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תְּהוֹם)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장 2절)

 여기서도 테훔이 혼돈과 함께 쓰인다. 게다가 마르두크가 혼돈(티아마트)를 찢어 하늘과 땅으로 나눈 것이 하나님이 혼돈을 하늘 위와 아래로 나눈 것과 유사하다. 이는 창세기가 바빌로니아 창조 신화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며, 실제 무신론자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이에 관해서 기독교에서 내놓는 설명은 주로 두 가지이다.

 1. 일부러 창세기를 읽는 사람이 바빌로니아 신화를 연상시키도록 한 것이다. 바빌로니아 창조 신화는 신들의 싸움이다. 신들끼리 서로 혼란스럽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 반면, 하나님은 폭력이 필요 없이 그저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신들끼리의 잔혹한 싸움을 통해서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질서 있고 규칙적으로 창조했다. 창세기를 읽는 고대 근동 사람들로 하여금 "이 신은 뭔가 확실히 다르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2.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이후 겪은 일련의 사건들은 대부분의 문명에서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 성경은 그것을 온전하게 적은 것이고, 다른 문화의 신화들은 이것을 다신교적으로 왜곡하고 변형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인간 창조 신화====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세력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기 때문에 같은 메소포타미아 신화라도 버전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윗부분은 바빌로니아계 신화고, 지금 설명할 이야기는 아카드계 신화이다. 아카드계 신화의 인간 창조 설화도 창세기와 비슷한 면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큰 신과 작은 신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 옛날, 큰 신들은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하지 않았다. 단지 작은 신들에게 명령하고 그들이 열심히 얻은 산물들을 누릴 뿐이었다. 작은 신들은 화가 나 반란을 일으켰고, 큰 신들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의 신 엔키[* 참고로 위에 에아랑 동일인물이다.]와 산파의 여신 닌후르쌍에게 신들을 대신해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만드는 역할을 부여했다. 엔키와 닌후르쌍은 검붉은 흙인 '''아다마'''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만드니 그들이 바로 사람이다.

 여기서 인간을 만든 재료인 '아다마'가 창세기의 '아담'과 매우 유사하다. 심지어 히브리어로 흙도 אֲדָמָה, 아다마이고 이것이 아담의 이름인 אָדָם의 어원이다.

 이에 관하여 기독교는 두 가지의 논지로 답한다.

1.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이후 겪은 일련의 사건들은 대부분의 문명에서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 성경은 그것을 온전하게 적은 것이고, 다른 문화의 신화들은 이것을 다신교적으로 왜곡하고 변형한 것이다.

2. 읽는 고대 근동 사람은 창세기에서 윤리적 우월성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이 born to be 노예라니 세상에 이런 부당한 인간 창조 신화가 어디 있단 말인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인간은 단지 신들의 이익 다툼에서 나온 신들의 노동을 대신하는 존재일 뿐이다. 반면 창세기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존재이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자신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존재이다. 당신은 대신 일해주길 원하는 신들을 따르고 싶은가, 우리를 사랑하는 신을 원하는가?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는 성경===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장 24절)

 이것은 당시 고대 근동에서 보기 힘든 윤리 의식을 담고 있다. 일부다처제가 만연했지만 남자와 여자 '둘이' 한 몸을 이룬다 하고 있다. 부모님과 이익 관계에 의해 부모님 맘대로 배우자가 결정되었던 시기에 '부모를 떠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일부일처제를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인간, 자연의 청지기===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8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다. 사실 정확한 발음은 '야웨(Yahweh, 표준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야훼)'에 가까운데 '여호와'는 중세 때 임시방편으로 재구한 발음이다. 이게 복잡한 원인이 있는데 짧게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망하고 나서 그 글씨를 발음하는 법을 까먹었다가(...) 나중에 온갖 자료를 모아서 재구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장 15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을 다스리고 가꾸어 나가라는 임무를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명령을 우리가 자연을 마음껏 착취하고 사용해도 좋다는 면허장처럼 사용해왔다. 현재 직면한 기후위기도 우리가 초래한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해결할 의무가 있다. 다른 생물들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생물들보다 월등히 높은 능력과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만 잘 살자고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라 이 자연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인곽 학생으로서 장래에 자연을 지키고 발전시켜나갈 인재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타락==
 한편, 하나님이 만드신 천사 중 몇몇이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보고도 반역해 하늘에서 추락했다. 이들은 악마가 되었으며 그 중의 왕은 사탄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어지럽힐 기회를 노리다가 방법을 찾았다. 바로 선악과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하와가 선악과 앞을 지나갈 때에, 뱀이 된 사탄은 하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하와! 오늘도 만나네."
 "오,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 중 가장 영리하고 멋진 뱀이구나!"
 "하하, 고마워. 근데,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 에덴 동산 나무에 열린 열매 전부를 너에게 먹지 말라 하셨어?"
 "아, 그건 아니야. 웬만한 건 거의 다 먹을 수 있는데, 지금 네가 올라 있는 선악나무의 열매만 절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셨어. 그걸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었나?"
 "아... 그래?"

 뱀은 간교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그거 알아? 하나님이 너흴 속인 거야. 너희를 무서워하시거든. 이 선악과를 먹는다 해도 너희는 죽지 않아."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이 열매를 먹으면, 네 눈은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선과 악을 알게 될 거야."

 뱀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대단한 비밀을 들추듯 말했다.

 "이걸 먹기만 하면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네 남편 아담도 마찬가지야. 하나님은 자기 외에 다른 자가 선악을 알게 되는 게 두려워서 너희에게 먹을 수 없게 한 거야."

 하와가 선악과를 가만 들여다 보니, 열매가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스럽기도 한 것이 꽤 입맛이 돋았다.

 "그럼... 한 번 먹어볼까?"

 하와는 아담을 부르고 그와 함께 선악과를 먹었다.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먹자, 그들의 눈이 밝아지며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몸을 가렸다. 하나님이 두려워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보시고는 말씀하셨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아... 하나님. 제가 벗고 있는 게 부끄럽고 두려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누가 네게 네가 벗고 있음을 알렸느냐? 설마 네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 그... 하나님께서 저에게 같이 있으라고 한 여자 하와가 저한테 주길래 저도 한 입 했습니다..."
 "음 그래? 하와야, 너는 왜 그렇게 했느냐?"
 "아, 그... 뱀이 저에게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제가 그만 따 먹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다.

 "너희는 이제 땀 흘리고 고생하고 나서야만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원래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반드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반드시 죽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와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자야, 앞으로 네가 아기를 낳을 때에는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또 너는 남편을 원할 테지만 남편이 너를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는 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서로 원수가 될 것이다. 너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여자의 후손은 너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또, 뱀은 평생 배로 기어다니며 사는 벌을 받았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생물 중 가장 영리하고 멋진 뱀은 가장 낮은 곳으로 지나다니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먹어 영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불 칼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았고 아담과 하와를 [[2025년 방송실 봉쇄 사건|에덴 동산 밖으로 쫓아냈다.]]

===해석 : 원죄===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로봇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이를 '자유의지'라고 한다. 근데 인간들이 이 자유의지를 악용해서 죄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은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최초의 죄를 원죄라 부르며, 원죄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죄는 지금까지도 강하고 당당한 기세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원죄의 이전과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창조하신 질서 있는 세계가 죄로 인한 무질서로 물들었다. 에덴 동산은 아름다운 창조 세계의 상징이며,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건 인간들의 죄 때문에 사람들이 창조 세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았다는 것은 인간이 반드시 죽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들을 영원히 살게 해 줄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생명나무를 만들어 놓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고, 그 벌은 죽음이다. 죄로 인해 이 땅에 죽음이 들어왔다.

===악의 문제===
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를 신으로 불러야 하는가?[* 출처 : 나무위키 '악의 문제' 문서]

 이는 흔히 '악의 문제'로 알려져 있다. 악의 문제에 대해 답하는 학문을 기독교에서 '신정론'이라 부른다.

 악의 문제에서 '악'은 인간과 사회의 죄악, 자연재해와 같은 자연악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인간의 죄라 하면은 살인, 폭력, 강간, 도적질, 거짓말과 같은 온갖 범죄들을 말한다. 자연악이라 하면 지진, 홍수, 전염병, 태풍 같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온갖 고통들이다.
 왜 평생 봉사를 해온 노인이 말기 암으로 고통 받으며 죽는 걸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면 왜 사랑하는 인간들을 위해 악을 단번에 없애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악과 고통을 만들지 않았으면 되는 일 아닌가?

 이 모든 사실들은 (착하거나 전지전능하거나 적극적으로 악을 막으려 하는) 신은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애초에 세상이 신의 뭔가 큰 뜻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라 그냥 물리적 과정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여러 악과 고통도 그냥 물리적 과정에 따라 일어나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자. 단, 아래 각 탭의 내용들은 서로 다른 신학자들이 따로 생각한 것이고, 때로 서로 다른 두 신정론이 서로를 반박하기도 한다는 점을 유의하도록 하자.

====자유의지====
 기독교에서 악의 문제에 관하여 답하는 대답 중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다. [[알제리]] 출신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신국론>에 자세히 나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닮아 인간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무척 사랑하셨기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그들에게 풍족한 환경과 힘들고 고통스럽게 일하지 않아도 음식과 다른 것들을 주셨다. 또, 자유의지도 주셨다. 자유의지 덕분에 우리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죄악을 선택했다. 이 죄악 때문에 세상에 악이 들어왔다.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죄에 따른 고통도 세상에 있어야 한다. 죄를 짓고도 멀쩡하게 잘 사는 세상이 오히려 불의한 세상이다.

 그럼 "처음부터 사람들이 죄를 못 짓게 설계했으면 되는 일 아닌가?"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준다고 해 놓고는 그 기능을 부분적으로 제한하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지인가? 우리는 동물들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 그들에게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개념을 동물들이 이해하고 실행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유의지고 뭐고 무조건 착한 일만 하게 설계되었다면 애초에 그 사람이 한 일을 진정으로 '착한 일'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자신이 스스로의 행동을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해야 진정으로 선한 행동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의미 있는 고통====

 당장 거대한 고통에 부딪힌 사람 앞에 자유의지만을 말하며 단지 악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고통을 딛고 성장할 힘을 주어야 한다.

 모든 고통이 오직 손해만 끼치는 것은 아니다. 치과에서 충치를 치료하는 고통을 잠시 감수하면 앞으로 계속 건강한 이빨을 사용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간의 고통을 주셔서 더 성장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저히 해결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고통은 어떤가? 예컨대 한 20세 청년이 어린 시절부터 오랜 연습 끝에 프로 야구 선수가 되어 첫 출근을 하던 도중 음주운전자의 차에 부딪혀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영원히 야구는커녕 걸어다니지도 못할 운명이다. 여기서 어떤 '성장'을 찾을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같은 의미 없고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고통이 대체 사람을 어떻게 나아지게 할까?

 이에 기독교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우리의 지식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만 의미 있는 게 아니라고.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때때로 기이해서 우리의 지혜로 단번에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청교도 혁명 시기에 "존 밀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 여러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크롬웰이 집권하자 크롬웰의 보좌관이 되어 왕정을 비판하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적부터 지나친 과로와 눈의 만성적인 질병으로 인해 눈이 멀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찰스 2세에 의해 왕정이 복고되고 찰스 2세는 밀턴을 감옥에 가둔다. 앞도 보이지 않고 세상의 모든 권력과 자유를 잃었다. 누구나 절망하고 삶의 의지를 잃을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전설의 서사시 <실낙원>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써냈다. 그의 사상은 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현재 영국에서 밀턴은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위대한 시인으로 불린다.

 하나님은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이유도 모르고 실제로 의미 없는 고통일 수도 있지만, 기독교는 그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미래로 나아가게 한다. 무신론적이고 극도로 유물론적인 세계관에서 모든 악과 고통은 '단순 사고' 그 이상으로 생각될 수 없다. 모든 악이라 불리는 것들은 물리 법칙이 작동함에 따라 의도 되지 않은 부차적 사건이기 때문에 어떠한 목적이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냥, 그저 있을 뿐이다. 도대체 그런 사고방식이 삶에 어떤 도움이 된단 말인가?

 물론 이 모든 논의는 아직도 "그래서 하나님은 왜 악을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속에서 죽어가는 군인과 민간인들, 갑작스러운 홍수에 무너지는 건물과 여러 사람들의 목숨, 인곽인들의 수면 부족. 왜 내 눈 앞에 보이는 바로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왜 침묵하는가? 사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악을 해결했다. 자신이 인간이 되는 다소 독특한 방법을 사용해서 말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한 예수님====
 아직 빌드업을 덜 했지만 예수님 얘기를 해 보자. 하나님은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지 않다. 하늘에 있는 높은 권좌에서 내려온다. 스스로의 편안을 버리고 그 누구보다도 낮아지신다. '예수'라는 이름이 사람이 되어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을 함께 겪으신다. 사람들에게 조롱 당하고, 버림 받고, 채찍질 당하고, 굶주리고, 피 흘렸다. 다른 모든 종교와 달리 기독교의 신만이 직접 사람이 되어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한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벌 받았다. 덕분에 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 하나님은 악의 문제를 방관하지 않고, 해결하셨다. 물론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현재의 악은 일시적일 뿐이다.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엔 아무도 눈물 흘릴 일이 없을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여 자유의지로 발생한 모든 죄악을 없앤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사람을 고통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같이 고통 당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종국엔 누구나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다음을 참고함.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2018.3.2, 팀 켈러 지음, 최종훈 옮김 [[https://namu.wiki/w/%EC%95%85%EC%9D%98%20%EB%AC%B8%EC%A0%9C|악의 문제]] [[https://namu.wiki/w/%EC%A1%B4%20%EB%B0%80%ED%84%B4|존 밀턴]] [[https://comic.naver.com/bestChallenge/detail?titleId=779637&no=35|예수쟁이 다이어리1]] [[https://comic.naver.com/bestChallenge/detail?titleId=779637&no=36|2]] [[https://comic.naver.com/bestChallenge/detail?titleId=779637&no=37|3]]

====선과 악의 기준은====

 사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악하다는 게 불가능하다. 이것을 악의 문제의 시작부터 제시하면 깊은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말장난부터 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아 맨 마지막에 배치했다.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 1949~)는 다음을 논지로 하는 '도덕적 논증'을 주장했다.

1.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객관적인 도덕 가치와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2. 객관적인 도덕 가치와 의무는 존재한다.
3. 따라서 신이 존재한다.

 중학교 사회 책에 나오듯이,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보편 윤리'가 있다. 이웃을 사랑하라,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같은 기본적인 것들 말이다. 우리가 무언가 도덕적인 주장을 할 때(예컨대 도둑질 하지 말라), 과연 우리의 주장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오늘날 '도덕 상대주의'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윤리적 규범이 시간(시대)과 공간(장소)에 따라 바뀐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선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선의 절대적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도덕적 행위를 강하게 주장할 수 없다. 극단적으로는 한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자. 당신은 그 사람에게 "살인하면 안 돼."라고 말한다. 그런데 살인자가

 "나는 살인이야말로 참 도덕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 당신 개인의 생각을 저에게 강요하십니까? 당신이 어떤 자격이 있길래..."

 라고 말하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공자나 맹자,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댄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들도 조금 위대한 사람일 뿐이지 그들의 생각이 꼭 우리의 윤리적 규범이 될 수 없지 않는가? 어떤 사람이든 다른 사람의 도덕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의 도덕적 기준은 우리보다 높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것에서 와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이 정도 수준의 논리는 고등학생 수준에서도 쉽게 반박될 수 있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도덕 명제는 단지 진화적 유리함에 의해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살인하는 경향이 있는 인류는 자연 선택에 의해 강하게 도태되었고 살아남은 우리들은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는 도덕적인 감정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도덕적인 의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살인한 뒤에 몰려오는 엄청난 죄책감 정도는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자연 선택의 흔적이라 하자. 그렇다면 살짝 복잡한 전쟁은 어떤가? 2025년 9월 미국에서 시행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공감하는 미국인은 34%, 팔레스타인에 공감하는 사람은 35%라고 한다. [[https://news.nate.com/view/20250930n32820|관련 뉴스 기사]] 각자 나름의 근거를 두고 말할 것이다. 근데 그 윤리적 근거는 어디서 나오는가? 남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을 근거로 말할 수 있는가? 무신진화론--미안하다. 내가 급조한 단어다.--의 도덕은 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불의와 악으로 가득찼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이 우주를 넘어서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기준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악할 수 없다. 조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품이 곧 선(善)이다.

다음을 참고함. [[https://www.reasonablefaith.org/translations/korean/miscellaneous/moral-argument|도덕적 논증]]

===미리 계획된 예수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장 15절)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함으로 벌 받는 것을 원치 않아서 예수님 탄생 훨씬 이전부터 예수님을 보낼 계획을 하고 있던 것이다.

===고대 근동 신화와 유사성===
 어떻게 보면 성경의 인간의 타락 부분은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 이야기와도 비슷하다.

 신들의 왕 제우스의 명령을 받들어 지혜로운 신 프로메테우스가 여러 남자 사람들을 만든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여 신들만의 소유물인 불을 몰래 훔쳐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다.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를 기뻐하며 숭배한다.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산의 바위에 묶고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한다. 또, 인간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 "아직 사람들 중 여자가 없으니 직접 여자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고 신들의 여러 좋은 능력을 불어넣는다. 특히, '헤르메스'라는 신은 호기심을 주었다. 모든 능력을 가진 완벽한 여자 '판도라'를 만들어 인간 세상에 보낸다. 판도라에게 반한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이 판도라와 결혼하고, 제우스는 둘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피토스(πῖθος)[* 흔히 상자라 하는데 오역이다. 그리스어 원어는 토기인데 우리나라 말로는 항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를 선물로 준다. 프로메테우스는 절대 제우스의 선물을 받지 말라고 경고했었지만, 판도라는 자신이 받은 호기심 때문에 피토스를 연다. 그러자 질병, 분노, 질투 등 온갖 재앙들이 세상 밖으로 빠져나간다.

 최초의 여자가 호기심으로 세상에 죄악을 퍼뜨렸다는 이야기의 핵심이 매우 비슷하다. 이에 대해서는 역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할 수 있다.

1. 인류는 대체로 과거의 아득한 사실을 나름의 신화로 기억하는데, 지금의 판도라 얘기처럼 다른 신화는 그것을 다신교적, 비윤리적으로 왜곡하고 변형하여 잘못 기억한 것이고, 성경은 이를 정확히 기억한 것이다.
2. 창조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읽는 사람이 하여금 야훼(하나님의 이름) 신앙이 다른 신들에 비해 윤리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는 신이 인간에게 재앙을 주기 위해 내려준 존재이다. 따라서 (남자인) 인간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여자를 만들었다는 식이 되어버린다. 반면, 성경의 하와는 하나님이 남자인 아담과 서로 돕고 인류의 번성을 위해 보낸 존재다. 읽는 사람은 둘을 무의식적으로 대비시켜 "이 신은 뭔가 다르구나~"하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이 선택한 가부장제?===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תְּשׁוּקָה) 남편은 너를 다스릴(מָשַׁל)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장 16절)

 그냥 읽어보면 뭔가 하나님이 가부장제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데 사실 '원하다'와 '다스린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살짝 흥미로운 해석을 할 수 있다. '원하다'라는 뜻으로 쓴 히브리어 תְּשׁוּקָה[* 발음은 '테슈카' 정도 된다.]는 강렬한 갈망, 충동적인 욕망을 뜻한다. 다스린다라는 뜻으로 쓴 히브리어 מָשַׁל[* 발음은 '마샬' 정도 된다.]는 지배하다, 강제로 억누르다 같은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원죄 이후로 평화로웠던 부부 관계가 뒤틀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부장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 죄 때문에 망가진 부부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말이다.

==가인과 아벨==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 밖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살다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 형인 가인은 농사 짓는 일을 했고 동생인 아벨은 가축을 치는 일을 했다. 어느 날, 가인과 아벨은 열심히 일해서 얻은 소득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로 한다.

 "아벨, 넌 뭘 바칠 거야? 난 내가 열심히 가꾼 곡식을 드릴 거야."
 "나는 내가 키우는 양이 낳은 첫째 새끼 양을 드리려고."

 둘은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가인은 화가 났는지 안색이 붉게 변했다.

 "아, 나도 제물을 바치고 아벨도 제물을 바쳤는데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는 거야!"

 그러자 하나님이 가인을 꾸짖으셨다.

 "가인아, 네가 뭘 잘했다고 화를 낸단 말이냐? 죄가 너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조심해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네가 죄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에도 가인은 너무나도 화를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아벨 저 자를, 어떻게 해야 속이 시원할까. 마침내, 가인은 방법을 떠올렸다. 저기, 아벨이 다가오고 있다.

 "아벨! 저기 멋진 들이 있는데 잠깐 구경하러 갈래?"
 "오! 좋아. 어쩌면 거기서 양을 잘 기를 수 있는 땅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가인은 아벨을 들로 데려가 놓고는 아벨을 죽여 땅에 묻었다. --이로써 가인은 전 세계 인구의 1/4를 죽이게 되었다.-- 

 가인이 돌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가인을 붙잡고 물어본다.

 "가인아, 아벨 어디 있는지 아니?"
 "[[삐빅|어? 아니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도 아니고..."

 가인의 대답을 들은 하나님은 가인에게 벌을 내렸다.
 "네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땅이 네 동생의 피를 받았고, 너를 저주할 것이다. 너는 이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땅이 네게 곡식을 주지 않을 거야. 너는 땅을 피해서 도망다니는 방랑자가 될 것이다."
 "아!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알았습니다. 제 죗값이 너무 무거워요. 만나는 사람들마다 저에게 화가 나 저를 죽일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너를 죽이는 사람은 내가 7배로 벌하도록 하마."

 이후 가인은 에덴 동산의 동쪽에 있는 '놋' 땅에서 살게 되었다.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
 왜 가인과 아벨 둘 다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은 받았을까? 이에 대해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로, 제물을 피 흘림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인은 하나님께 생명을 드려야 하는데 피에 생명의 기운이 있다고 생각했다. 가인은 곡물이니까 피를 흘리지 않고 아벨은 양을 드리지 않았는가? 다만 이 해석은 곡물 제사도 정통한 제사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둘째로, 가인이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벨은 힘들여 얻은 첫 번째 생산물을 드렸지만, 가인은 그냥 곡식을 드렸기 때문이다.
 셋째로 제물을 바치는 마음의 차이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11장 4절)

 아벨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제물을 바쳤지만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용서하는 하나님===
 마지막에 하나님은 아벨을 죽인 가인을 용서하셨다. 심지어 가인을 해치려는 자는 가인보다 7배나 더 큰 벌을 주겠다고까지 했다. 물론 하나님은 죄 지은 사람을 그냥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죄를 진심으로 깨닫고 뉘우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어떤 죄라도 용서해 주실 수 있다.
==대홍수==
 하나님은 아들 둘을 잃은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라는 이름의 새 아들을 가지게 하셨고, 셋의 자손들은 널리 번성하여 어느덧 '노아'라는 사람이 살던 시대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사람들은 에덴 동산의 선악과 이후로 줄곧 포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번성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악한 생각만 하고 악한 계획만 세울 뿐이었다. 사람들이 땅에서 온갖 죄를 저질러 땅이 극심히 혼돈한 상태였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한탄하셨다. 노아만이 선하게 행동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고, 하나님은 노아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 주셨다.

 "모든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 커서 온 땅에 포악함이 가득하구나. 이제 내가 큰 홍수를 일으켜 온 땅의 숨 쉬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그리고 노아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주셨다.

 "너는 이제 거친 홍수 속에서 생명을 보호할 크고 네모난 배를 만들어라. 길이는 300규빗, 너비는 50규빗, 높이는 30규빗이다. 그리고 거기에 너희 가족들과 모든 동물들을 태워라. 제물로 바칠 만한 정결한 짐승들은 암수 7쌍씩, 그렇지 않은 동물들은 암수 1쌍씩만 태워라. 그렇게 해서 동물들의 명맥을 보존하고 또 네 먹을 것도 채워라."
 보통 규빗은 현대의 단위로 45cm로 본다. 즉, 길이 135m, 너비 22.5m, 높이 13.5m 정도 되는 셈이다. 어쨌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했다.

 어느덧, 심판의 날이 되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 아까 노아가 만든 네모난 배다.]에 들어가라고 알렸다.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이 방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깊은 샘물들이 터지고 [[면학실 천장 뚫림 사건|하늘의 창문이 열려 물이 쏟아져 내렸다.]] 40 일 동안 비가 퍼부었다. 점차 높은 산들도 다 물에 잠겨버리고, 숨 쉬는 생물들도 다 죽어버렸다. 오직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동물들만 살아남았다. 물이 온 세상을 덮은 상태가 15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물이 슬슬 빠지기 시작했다. 노아는 홍수가 끝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새들을 날려 보았다. 첫 번째로 까마귀를 날렸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까마귀는 잡식성으로 땅에 온갖 사체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노아는 물이 완전히 마르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땅에 머물 곳이 있음을 알았다. 또 조금 이따가 비둘기를 날렸다. 비둘기는 좀 날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직 땅이 사람 살 만큼 회복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다시 7일 뒤에 비둘기를 한번 더 날렸다. 이번엔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다. 나무가 자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다시 7일 뒤, 노아는 마지막으로 비둘기를 날렸고 비둘기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땅에 생물이 살 만한 환경이 된 것이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밟는 육지였다. 노아는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들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이 그 향기를 받으시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약속했다.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 너희는 널리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라. 너희는 서로 싸우며 피 흘리지 마라. 너희들 중 누군가 다른 사람을 죽이면 내가 그 사람도 피 흘리게 할 것이다. 이제 다시는 내가 사람들의 죄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내가 다시는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 큰 무지개를 띄우셨다.

 "너희는 이 무지개를 보면서 나의 약속을 기억해라."

 노아와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 세계로 널리 퍼져 나갔다.

===자신이 만든 세상을 멸망시킨 이유===
 천지 창조 파트에서 보았듯 하나님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셨다. 사람들의 죄로 인해 땅이 혼돈했고, 이는 창조 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이 질서를 만들며 나누었던 물을 다시 합쳐서(하늘 위에 있던 물이랑 아래 있던 물이 솟아나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세상을 리셋한 것이다.

===방주에 태운 동물들은 몇 쌍?===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창세기 6장 19절)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창세기 7장 1절~3절)

 6장에서는 각기 암수 한 쌍씩 태우라고 했다가 갑자기 7장에서 말을 바꿔서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태우라고 하고 있다. 이는 매우 혼란스러운데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약간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정결한' 짐승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제물로 바칠 수 있는 동물이라 해석된다. 따라서 6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암컷 한 마리, 수컷 한 마리 1쌍씩을 하도록 하되, 특별히 7장에서 제물로 바칠 수 있는 동물들은 암컷 7마리, 수컷 7마리라 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 7장 3절에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이라 한 것일까? 사람들은 이것을 암컷 1마리, 수컷 1마리 합쳐서 총 둘(즉, 암수 둘)이라고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7장 2절과 3절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자.

מִכֹּל הַבְּהֵמָה הַטְּהוֹרָה תִּֽקַּח־לְךָ '''שִׁבְעָה שִׁבְעָה אִישׁ וְאִשְׁתּוֹ''' וּמִן־הַבְּהֵמָה אֲשֶׁר לֹא טְהֹרָה הִוא '''שְׁנַיִם אִישׁ וְאִשְׁתּוֹ'''׃ (2절)

גַּם מֵעוֹף הַשָּׁמַיִם שִׁבְעָה שִׁבְעָה זָכָר וּנְקֵבָה לְחַיּוֹת זֶרַע עַל־פְּנֵי כָל־הָאָרֶץ׃ (3절)

 여러분은 별 생각 없이 맨 왼쪽 옆에 ':'비슷한 글자부터 읽고 있겠지만 그건 히브리어 마침표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2절의 שִׁבְעָה שִׁבְעָה אִישׁ וְאִשְׁתּוֹ는 직역하면 '일곱 일곱 수컷과 그의 암컷'이다. 아까 살펴보았듯 수컷 7마리와 암컷 7마리(7쌍)이다. 한편, 그 뒤에 שְׁנַיִם אִישׁ וְאִשְׁתּוֹ는 직역하면 '둘씩 수컷과 그의 암컷'이다. 즉, 수컷 1마리와 암컷 1마리 합쳐서 둘씩이라 말한 것이다.
===전 세계의 대홍수 설화===
 전 세계에는 엄청나게 많은 대홍수 설화가 있다. 그 중에서 메소포타미아의 대홍수 설화가 노아의 방주랑 가장 비슷하다.

====메소포타미아 신화 : 우트나피쉬팀의 방주====
 성경이랑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는 게 좀 재미있어서 자세히 보도록 하자.[* 대홍수는 수메르계, 아카드계 등등 버전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여기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대충 비슷해서 다 합쳐서 서술한다. 지우수드라, 아트라하시스, 우트나피쉬팀이 모두 동일인물이다.]

 신들의 왕 엔릴이 잠을 자려는 데 인간들이 소음을 너무 많이 일으켜서 시끄러웠다. 그는 신들을 모아 인간들을 대홍수로 쓸어버리자고 한다. 인간을 만든 엔키와 인간 덕분에 먹고 살고 있었던 많은 신들이 반대했지만, 엔릴은 계속 밀어붙여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다. 인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벌하겠다고 했다. 지혜의 신 엔키는 인간들을 구하기 위한 방법을 떠올린다. 자신을 따르던 도시의 왕이자 제사장 '우트나피쉬팀'이 살던 집의 갈대 벽 앞에 선다.
 "아, 대홍수 때문에 인간이 몰살당하게 생겼는데 이를 인간에게 알리지도 못한다니! 갈대 벽아, 너라도 내 얘기를 들어 봐라."
 그러고는 인간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술술 말하는 것이다.
 "가로, 세로, 길이가 같은 정육면체 방주를 만들고, 거기에 너와 마을 사람들을, 그리고 동물들을 태운다면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텐데! 내 충실한 제사장 우트나피쉬팀이라면 그런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텐데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해 참 원통하구나..."
 우트나피쉬팀은 엔키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열심히 방주를 만든다. 드디어 엔릴이 홍수를 일으키는 날이 되었고, 신들은 우주로, 우트나피쉬팀은 방주에 대피했다. 40일 동안 전 세계에 홍수가 계속되었다.
 비가 그치자 우트나피쉬팀은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다시 돌아온 걸 봐서 아직 땅에 물이 빠지지 않은 것을 알았다. 며칠 뒤, 다시 비둘기를 날려보내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땅이 좀 살 만해진 것이다.
 우트나피쉬팀과 사람들은 방주에서 나왔다. 동물을 잡아 제사를 바쳤는데, 고기 향기를 맡고 굶주린 신들이 파리 떼처럼 몰려왔다. 대홍수 동안 인간이 바친 제물을 먹지 못해 매우 굶주렸기 때문이다. 신들은 엔릴에게 왜 생각 없이 대홍수를 일으켰냐고 따졌다. 엔릴은 우트나피쉬팀에게 영생의 풀을 주어 신들이 사는 낙원에 살 수 있게 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신화와 성경의 노아 이야기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 신의 분노로 인해 홍수가 발생함.
2. 신이 한 인간을 택하고 네모꼴 방주를 만듦.
3. 홍수 일수가 40일임.
4. 방주에 동물들을 종류대로 담음.
5. 홍수 끝난 후 선택된 인간이 제물을 바치고 신이 향기를 맡음.
6. 홍수 끝난 마지막 신이 무언가 약속을 함.

 그렇다면 기독교의 노아의 방주가 다른 홍수 신화보다 특별히 더 좋은 점이 무엇일까? 기독교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다른 홍수 설화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면 기독교를 믿을 필요가 없다.

 자세히 보면 공통점이라고 뭉뚱그린 부분에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엔릴이 화를 내며 홍수를 일으킨 이유는 고작 자기가 자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인간들은 활발한 동적 질서를 갖는 반면 신들은 고요한 정적 질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트라하시스(AtraḪasīs-Mythos)'와 창세기의 인간 이해 - '아트라하시스'의 아카드어 본문 번역을 중심으로 -, 감리교신학대학교 목회신학대학원, 전좋아)] 즉, 자기 편하라고 홍수를 일으킨 것이다. 반면 창세기의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너무 커서 땅이 그 죄로 물들은 것을 보고 정의로 심판하기 위해 홍수를 일으키신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신들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을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다. 애초에 자기들이 일을 안 하려고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수 동안 메소포타미아 신들은 아무것도 못 먹고 굶주림에 힘겨워했다. 사실 제물 앞에서도 엔릴은 누가 왜 인간을 살려 놨냐고 호통을 치고 엔키가 둘러대며, 다른 신들이 너 때문에 배고파 죽겠다고 엔릴을 욕하면서 싸운다. 배고파서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 흡족해 하시고 노아와 약속을 맺은 하나님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마지막에 맺은 약속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욕구를 반영하여, 우트나피쉬팀 이야기의 결말은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으로 끝난다. 즉, 그들의 관심은 영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하나님은 노아한테 서로 싸우면서 피 흘리지 말라는 약속을 하는데, 그 관심이 선과 악에 가 있는 것이다.

====다른 대홍수 신화====
[[https://namu.wiki/w/%EB%8C%80%ED%99%8D%EC%88%98%20%EC%8B%A0%ED%99%94|나무위키]]에 잘 나와 있다.

====실제 대홍수의 발생 여부====
 지금까지의 과학 연구에 의하면 전 지구적 대홍수의 흔적은 없으며 실제로 있기도 힘들다고 한다. 종교적 입장을 제외하고 세계 곳곳의 대홍수 설화의 기원에 대한 가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노아의 방주에 관한 가설 중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흑해의 대범람 가설이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가던 즈음[* 정확한 시기는 플라이스토세 말기라는 설과 홀로세 초기라는 설이 대립한다.] 빙하가 녹아서 흑해로 몰려들었고, 흑해의 수위가 급상승하여 그 저지대의 마을이 잠겼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을 배제하고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대홍수 설화가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모티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단 기본 구조가 너무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 기원이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중력적으로 불안정한 정육면체 배를 만든 반면 노아의 방주는 그 사이즈가 300:50:30으로 더 발전된 배 형태를 담았기 때문이 메소포타미아 신화가 먼저라 생각한다.

 이러한 가설 앞에서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보수적이고 진보적인 정도에 따라 여러 관점이 있다. 우리 나라 목사님들께 물어본다면 아마 1을 설명하실 것이다.

1. 틀릴 수 있는 이성으로 성경이 옳고 그름을 논하면 안 된다. 사람의 이성에 의해 세워진 과학은 변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직접 믿으라고 주신 성경을 우선적으로 믿어야 한다. 지금 역사적으로 대홍수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가설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우리의 과학적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성경을 쓰여 있는 그대로 믿는 대신 과학적 발견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2. 온 지구를 덮은 대홍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대 근동을 파괴했던 큰 대홍수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각 지역마다 다르게 전승되어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지역적 대홍수는 충분히 많았다.
 이 관점은 1보다 개연성은 있지만 성경 본문에서는 '모든', '다' 같은 표현을 사용해 전 지구적 대홍수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을 훼손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3. 대홍수 설화의 기원이 어떠하든 유대인들이 메소포타미아의 대홍수 설화를 접하고 나서, 그것을 그들의 신앙에 맞게 일종의 '리메이크'를 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비윤리성을 강하게 지적하고 노아의 방주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을 크게 강조한다.
 이 관점은 성경을 하나님이 내려주신 특별한 책이 아니라 그냥 특정 시대 고대 근동의 산물로 격하시킨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바벨탑==

 아직 노아의 자손이 세상 곳곳에 퍼져나가기 전의 일이다. 이 때는 모든 사람들의 언어가 갈라지기 전이었다.
 니므롯이라는 전사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거만히 서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로, 곳곳의 도시들을 정복해 그의 나라를 세웠다. 그는 사람들이 뭉쳐서 강력한 힘을 내고 싶어 했다.

 "자, 여러분들! 우리 힘을 합쳐서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읍시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우리가 뿔뿔이 흩어지지 않게 합시다!"

 이에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서로 쓰는 말이 같아서 공사가 척척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내려와서 그들이 쌓는 탑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저 자들이 같은 말을 써서 똘똘 뭉쳐 있군. 말을 혼잡하게 흩어서 저들의 일을 무너뜨려야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의 말을 다르게 했다. 역시 사람마다 말을 못 알아들어서 공사를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사람들은 공사를 그만두고 흩어졌다. 그리고 그 지역은 바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히브리어로 혼잡하게 한다는 말이 '발랄(בָּלַל)'이기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말장난인데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가 알아들을 리가 없다...]

===교만===

 세상에 몇몇 재주를 가진 사람은 많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전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자기들 딴에 자기들이 하나님만큼 잘 났다고 생각해서 탑을 쌓았다. 하지만 그들이 쌓는 탑은 하늘에 닿을 듯 웅장하기는커녕 하늘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서 그 모습을 확인해야 할 판이었다.[* 당연히 하나님은 몸도 없고 어차피 밑에서 뭔 일이 벌어지는지는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정보를 얻기 위해 시각 자료를 확인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다.]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약하고 약하다. 하나님이 그저 그들의 말을 뒤섞었을 뿐인데 언어 장벽조차 이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자.

==아브라함 선택==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하나님을 까먹고 온갖 가짜 신들, 그러니까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르'라는 도시가 있었다. 우르는 매우 번성하면서도 달의 신 '난나'를 만들어 섬기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그리고 그 도시엔 '아브람'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아브람이 별 생각 없이 현생을 살던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떠나 내가 알려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통해 큰 민족을 만들고 너에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위대하게 하겠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을 내가 저주할 것이고 너를 축복하는 사람을 내가 축복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가나안(팔레스타인) 땅에 가게 하셨다. 아브람은 자신의 조카인 롯과 함께 짐을 싸서 가나안 땅으로 내려갔다.

===미리 계획하는 하나님===
===팔레스타인 분쟁===
==소돔과 고모라==
===동성애===
===롯의 아내의 최후===
==하갈과 이스마엘==
===아랍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
==이삭 번제==
===진정한 믿음===
===인신공양===